Stand by you

原作者 : 浅木原忍 (http://r-f21.jugem.jp/)
原題 : スタンド・バイ・ユー
         (http://coolier.sytes.net:8080/sosowa/ssw_l/?mode=read&key=1257253753&log=90)
그림 : 마루
번역 : 선배
작품 태그 : 비봉클럽, 메디슨…같은 오리캐 있음, 모 히라사와 씨.





















 

 



















      一

 

「있잖아 메리, 데이트 갈 때는 어디가 좋아?」

입에 물고 있던 포키[각주:1]가, 또각 부서지면서 침대로 떨어졌다.

휴강이 된 금요일 오후, 나는 렌코의 방에서 침대에 드러누워 렌코의 책들을 뒤져보고 있었다. 우리 비봉클럽은 멤버를 다해봐야 두 명에다가 비공개 서클. 대학 내에 동아리 실을 가질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런 이유로, 모임 장소는 거의 누군가의 집이거나 자주 가는 찻집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어느새 질릴 만큼 익숙해진 렌코의 방에서, 나는 침대를 점거하고 책장에 있던 우스이 유지(薄井ゆうじ)의 『고래가 내리는 숲(くじらの降る森)』을 읽던 참이었는데.

「……뭐야, 갑자기?」

나는 미심쩍게 파트너를 돌아보았다. 파트너는 직접 끓인 커피를 느긋하게 홀짝이면서, 언제나처럼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띤다.

「깊은 의미는 없어. 그냥 호기심.」

손가락을 까딱이는 렌코에게,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한숨을 토했다.

「서점. 아니면 도서관.」

「역시나 재미없는 대답이네.」

「렌코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는 없어.」

드러누운 자세에서 일어나, 나는 의자에 앉아있는 렌코와 마주 보았다.

「근데 메리의 경우, 서점이나 도서관 데이트는 부적절하다고 보는데.」

「어머, 왜?」

「왜냐면, 상대방이랑 있는 것보다 재밌는 책을 찾는 게 우선이잖아?」

윽, 무심코 신음했다. 그건 뭐,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그래?」

반박하는 내게, 렌코는 어쩐지 즐겁게 웃었다.

「책 이야기를 못하는 사람하고는, 사귈 마음 없는걸.」

「메리의 마니악한 미스터리 이야기에 어울려주는 좋은 사람을 찾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하는 파트너가 정작 읽던 것은 야마구치 마사야의 『기우(奇偶)』였다.

「딱히 그렇게 마니악하지도 않은데.」

읽은 책의 라인업을 읊는다면 렌코가 위다. 복고풍이 유행하는 미스터리라면 모를까, 사토 테츠야(佐藤哲也)라던가 후카보리 호네(深堀骨)라던가 아오키 쥰고(青木淳悟) 등을 요즘 누가 읽는단 말인가.

「젊은이여,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테라야마 슈지? 책을 버리고 만화 캐릭터 장례식 치른 사람 아니야?」

「내일의 죠 정도는 읽어, 메리. 어차피 라스트 신밖에 모르겠지.」

정곡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오래된 만화까지 망라하는 렌코야말로 어떨까 싶다.

「렌코라면, 책을 버리고 불가사의를 찾자――겠지?」

코끝에 손가락을 들이대고 말했다.

렌코는 즐겁게 미소 지으면서, 「애석하게도 메리.」하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불가사의를 찾으려면 문헌도 필요하다고.」

「그리고 또, 인광당(燐光堂)[각주:2]에서 수상한 고서라도 가져오겠지.」

방 한쪽 구석에 방치된 낡은 하드커버를 본다. 언제였는지, 렌코가 인광당에서 사온 오컬트 관련 고서다. 나도 설렁설렁 읽어보았지만, 한없이 수상한 인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구지라 도이치로(鯨統一郎)의 이야기가 훨씬 신빙성 있어 보인다.

「좋잖아, 이 세상 정보의 9할이 쓰레기더라도, 남은 1할에서 보여주는 걸 자세히 조사해나가는 과정도 재미니까.」

「무슨 법칙인데, 그게.」

「스터전의 법칙이야. 『온갖 것의 9할은 쓰레기다.』」

「누구?」

「어, 시어도어 스터전을 몰라? 메리, 그러고도 독서가야? 『시간이 걸리는 조각(時間のかかる彫刻)』이나 『반짝이는 조각(輝く断片)』이나 『일각수・다각수(一角獣・多角獣)』같은, 주옥같은 단편들을 읽지 않았다니 아까운 것도 정도가 있다고!」

「들어본 적도 없어.」

「거기 꽂혀있으니까 빌려줄게, 아니 빌려줄 테니 읽어. 그치만 팔십년 전의 귀중한 고서니까 소중히 다뤄야 돼.」

「……재판 안 돼?」

「민간 달 투어가 실현된다면, 여러 SF명작들도 재판되려나. 한탄스럽게도――.」

「우주개발이 정체되면 SF도 쇠퇴한다고는 전에도 들었어.」

언제나처럼 쓸모없는 회화는, 역시 언제나처럼 산으로 가게 된다. 결국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게 되는 것이 평소 패턴. 그나저나 이거, 무슨 얘기 중이었지.

「애초에, 실현되더라도 분명 터무니없이 비싸서 서민들은 손도 못 댈걸.」

「민간 달 투어?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어떤 것일지라도 대중화가 되기까지는 상당히 고생이니까. 부담 없이 데이트로 이용할 수 있게 되려면 22세기는 돼야겠지.」

「괜찮네, 달 데이트. 조용할 것 같고, 천천히 느긋하게 책 읽을 수 있겠다.」

「우주에 가서까지 뭘 읽으려고?」

「글쎄, 『마이크로 결사대』같은 게 괜찮을 거 같은데.」

「아시모프는 아는구나, 메리. 근데 뭐야, 우주한테 시비 거는 선택은.」

「여름에는 냉방이 시원한 방에서 냄비 요리 먹는 게 최고지.」

그럼 저녁은 냄비 요리로 할까? 하고 렌코는 웃었다. 암흑냄비만 아니라면야, 하고 나도 쓴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렌코가 눈치 채지 않게 마음속으로 작게 한숨을 쉰다.

눈앞의 파트너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 이야기를 못하는 사람하고는, 사귈 마음 없는걸.

그 말의 의미를, 설마 눈앞의 파트너는 깨닫고 있을까.

역시, 나는 렌코처럼 뭐든지 알 수 있지는 않다.

 





      二

냄비요리는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적당히 집어넣어도 좋지만.

중요한 냉장고의 내용물이 텅 빈 상태로는 역시 어쩔 수 없다.

「근데, 무슨 냄비요리 할까? 키리탄포?」

「닭고기가 좋을 것 같아. 몸에 좋고 싼 거.」

그래서 햇빛도 저물고 있는 저녁. 나와 렌코는 방을 나와 근처 슈퍼마켓으로 장을 보러 향했다. 시내에서 제일 싸다고 자부하는 가게는, 슬슬 저녁 준비를 하려는 주부나 그들의 아이들로 나름 북적거렸다.

   포인트 카드 사용을 권하는 가사의 단조로운 곡이 끝없이 흐르는 스피커 곁을 지나치고,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적당한 야채를 골라 담는다. 배추, 파, 잎새버섯. 물론 요즘 천연야채들은 구할 수가 없으니 전부 싼 합성품이다.

「메리, 표고버섯 못 먹지?」

「그건 사람이 먹을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할 것 까진. 뭐, 국물은 잎새버섯으로 괜찮겠지.」

국물에 표고버섯을 통째로 넣는 행위는 광기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하고 렌코가 눈앞에서 웃으면서 표고버섯을 우물거렸다. 제발 그것만큼은 참아줬으면 싶다. 인간, 어떻게 하더라도 참지 못하는 것이 하나나 둘 정도는 있는 법이다.

「남은 건 두부랑, 베니쇼가[각주:3], 베니쇼가♪」

「냄비요리에 베니쇼가는 하지 말라니까.」

「에이, 맛있잖아.」

희희낙락 베니쇼가를 바구니에 넣는 렌코의 팔을 붙잡았다. 규동을 베니쇼가로 다 메울 정도로 베니쇼가를 사랑하는 이 파트너, 자칫하면 뭐든 베니쇼가로 덮어버리는 것도 어떻게 해줬으면 싶다.

「아, 메리, 닭고기 확보해놔. 싼 걸로.」

「네네.」

나를 쫓아내고 베니쇼가를 사들일 모양이라고 경계했지만, 어차피 결국 먹는 건 렌코다. 어깨를 으쓱이면서, 나는 정육매장으로 향했다.

학생으로서는 도저히 손이 가질 않는 가격의 쇠고기를, 주부들이 바구니에 넣는 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팩으로 포장된 닭고기 가격을 비교한다.

「우이,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아무 거나.」

자그마한 여자애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인형을 소중하게 가슴에 끌어안고 어쩐지 낙담한 표정으로 손을 잡고 따라오는 소녀도, 이전에 렌코의 맨션에서 봤다.

「어머, 안녕하세요.」

그쪽도 나를 알아보고 우아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나도 꾸벅 인사를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닭고기 팩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왠지 바보 같다.

렌코와 같은 맨션에서 사는 사람으로, 화단의 관리인이기도 한 카자미 유카(風見優花) 씨. 손을 잡고 오는 소녀는, 카자미 씨가 자주 돌봐주는 쿠스리야 우이(薬屋うい)였다.

「우이, 인사는?」

「……안녕하세요.」

카자미 씨가 부드럽게 타이르자, 우이는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기분이 안 좋은 아이를 상대하기는 더 어려워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카자미 씨를 보았다.

「우사미 씨랑 쇼핑이니?」

「네, 그런 참이에요.」

「사이가 좋구나.」

카자미 씨는 미소를 짓고는 「그럼, 우이가 좋아하는 햄버그로 하자.」라면서 간 고기를 손에 들었다.「햄버구?」하고 고개를 드는 우이에게, 「그래, 햄버그. 케첩으로 꽃도 그려줄게.」하고 카자미 씨가 말하자 우이의 표정이 펴졌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재차 닭고기 팩을 손에 들었다. 대충 늘어놓아진 것들을 확인했지만, 아마 이것이 제일 싸다. 계산은 그다지 자신 없기에 확신은 못하지만.

「햄버그, 햄버그♪」

어느새 기분이 나았는지, 우이는 재롱부리듯이 카자미 씨의 다리에서 신이 났다. 손에 든 인형이 난폭하게 휘둘러져서 조금 불쌍하다.

그런 모습을 친근하게 보는 카자미 씨의 시선은 매우 따뜻해서, 손을 잡은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정말 모녀지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이의 성씨는 쿠스리야니까,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아, 그럼 전 이만――」

「그래, 우사미 씨한테 안부 전해줘.」

「……바이바이.」

인형의 손을 흔드는 우이와 카자미 씨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는 종종걸음으로 렌코에게 돌아갔다. 아직 야채 코너에 있는 렌코를 불러 바구니에 닭고기를 넣고, 역시나 베니쇼가로 가득 찬 바구니를 보고 한숨을 쉰다. 뭐, 냄비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뭐든 괜찮겠지.

「정육매장에서, 카자미 씨랑 우이 만났어.」

「어머, 우연이네.」

렌코는 딱히 흥미도 없게 말했다. 뭐, 같은 맨션에 살고 있으니까 같은 슈퍼에서 마주치는 것도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말 모녀지간 같더라, 카자미 씨랑 우이.」

「나도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어. 우이네 부모님은 본 적도 거의 없고.」

우이네 부모님은 바쁜 사람들이라서 휴일에도 좀처럼 집에 없는 모양이라고 전에 렌코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카자미 씨가 돌봐주고 있으니까, 두 사람이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유치원에서 데려오거나 배웅하는 것도 카자미 씨가 하고 있고, 의외로 우이도 카자미 씨를 엄마처럼 생각하기도 해.」

「그건 좀…….」

어쩌면 그런 일도 있을지 모른다. 바빠서 대부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진짜 어머니와, 자신에게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주는 카자미 씨를――.

나는 고개를 젓는다. 다른 집 사정을 흥미본위로 상상하다니 몹쓸 일이다. 그런 건 완전히, 이 파트너의 악영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다고 렌코가 우물가에서 아낙네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소란스럽다는 것은 아니고.

「그러고 보니, 아직 메리네 부모님이랑 만난 적이 없네.」

양념간장을 손에 들면서, 문득 생각났는지 렌코가 말했다.

「두 분 모두 본국에 계시니까. 일본은 멀어.」

「연말연시에는 귀성하지, 메리.」

「시차가 달라서 고생했어.」

본국은 역시나 멀고 부모님도 그렇게 한가로운 것도 아니니까, 그쪽에서 교토로 오는 일도 좀처럼 없다. 뭐, 언젠가 부모님도 익숙한 교토로 돌아오고 싶다고는 생각하는 것 같지만, 부친의 일도 있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마찬가지로 말하자면, 나도 렌코네 부모님 뵌 적 없어.」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렌코는 도쿄 출신이다. 교토에서 나고 자란 나였지만 도쿄에는 가본 적이 없다. 보유토카이도(卯酉東海道)가 생겨서 편도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고는 해도, 수도 기능을 잃고 오래 지난 오늘날 도쿄는 좁으면서 인구가 많을 뿐인 시골이다. 애써 관광할 장소도 아니다, 라는 것이 교토 사람들 대부분의 인식이다.

「렌코네 부모님은, 역시 렌코랑 닮아서 괴짜일까?」

「정직하게 무례하네, 메리. 아니, 분명 우리 부모님이 별나긴 해도.」

솔직하게 말했더니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 파트너로 하여금 《별나다》고 말하게 하다니, 어떤 사람들일까. 살짝 흥미가 솟는다.

「그건 좀 신경 쓰이네. 어떤 분들이야.」

「그래그래, 그럼 냄비요리라도 먹으면서 우리 부모님의 기상천외 에피소드라도 들려줄게.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는 분들이야, 양쪽 다.」

「즉, 그 부모에 그 딸이라는 거구나.」

내 말에, 렌코는 마치 뜻밖이라고 말하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 메리, 비상식을 비상식으로서 받아들여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식이 빠져선 안 되잖아? 상식에 입각하지 않은 비상식이란, 달걀 프라이를 만들지도 못하는 사람의 창작요리에 불과해.」

「우사미 렌코는 괴짜이다. 렌코는 자기가 상식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괴짜라고 생각하는 괴짜는 없다. 따라서, 우사미 렌코는 괴짜이다. ――아름다운 삼단논법 완성이네.」

「메리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너무하다니까.」

한탄하듯이 과장되게 하늘을 올려보는 렌코에게, 나는 쓰게 웃으면서 바구니에서 넘치는 베니쇼가를 몰래 빼냈다.





      三

교토부립식물원은 백오십년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식물원 중 하나다.

전시대적인 서민오락에 대해서 비교적 까다로운 교토에서는, 젊은 층을 겨냥한 오락시설 자체가 많지 않다. 자연히 데이트 장소도 신사나 절, 사원 등이거나, 혹은 식물원 정도로 한정된다.

요컨대, 부립식물원이 현재 교토시내에서는 기본적인 데이트 장소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어떤 인과인지, 일요일. 나는 그곳에 렌코와 둘이서 찾아왔다.

「저기, 렌코.」

「왜? 메리.」

「왜 나는 지금, 이런 곳에서 렌코랑 나란히 걷는 걸까.」

「그야 물론, 데이트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 렌코는 내 손을 일부러 인지 꼭 잡아왔다.

잡힌 손바닥의 감촉이 굉장히 부끄러워서, 나는 무심코 렌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있잖아 메리, 이번 주 일요일에 데이트할래?

렌코가 갑자기 그렇게 말한 건 며칠 전이다. 렌코니까 어차피 폐허 탐색이나 오컬트 스팟 순회겠지, 그것은 즉 비봉클럽 활동과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래 그럼, 어디로?」라고 가볍게 대답했는데.

주위를 둘러보자, 그렇고 그런 조합은 많이도 보였다. 젊은 남녀 짝으로 걷는 것은 우선 틀림없이 그렇겠지. 동성끼리도 2인조라면 그럴 가능성은 높다. 요즘 동성혼은 마이너하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

「……렌코니까, 분명 폐허탐험이나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머 메리, 그쪽이 좋았어?」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단지――명백하게 커플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틈에서 렌코와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엄청 부끄럽다, 그뿐이다.

「왜, 여기야?」

「그러니까, 데이트라서 그렇다니까.」

렌코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진의를 나로서는 읽을 수 없다. 아니, 렌코가 생각하는 것,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비봉클럽 활동이 아니라?」

「메리도 참, 몇 번이나 말했잖아. 데이트라니까.」

「누구랑 누가?」

「나랑 메리가.」

「왜?」

「내가 신청했으니까.」

――왜 나한테 권했어? 일부러, 데이트라는 명목을 대면서까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말이 입안에만 맴도는 바람에, 결국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다.

렌코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기 전에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설마 렌코에게 내가 모르는 그런 사람이 있는 걸까?

그런 상상에 가슴속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렌코의 교우관계는 넓다. 나는 그 관계 일부밖에 모른다. 일 년 이상을 알고 지냈으면서도 생각해 보면, 나는 렌코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모를지도 모른다.

우사미 렌코. 비봉클럽의 멤버, 마이페이스인 내 파트너.

언제나 함께 있다고는 해도, 24시간 붙어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모르는 렌코가 있고, 렌코가 모르는 내가 있다.

그런 당연한 것들에게, 어째서 가슴속이 조금씩 욱신거리는 걸까――.

「메리, 마음에 안 들어? 역시 도서관이 더 나았나?」

식물원 문 앞에서 렌코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담장 너머에서 얼굴을 내미는 나무들을 올려보았다.

「괜찮아. 여기 살면서 가본 적 없기도 하고, 가끔은.」

「――오케이, 그래야지.」

렌코는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내 손을 끌어당겨 티켓 판매하는 창구로 걸었다.

손이 이끌려 걸으면서, 나는 오늘 몇 번인가의 한숨을 가슴 속으로 억눌러 참았다.

다만, 꽉 쥔 손과 조금 땀이 찬 감촉에 심장의 고동이 평소보다 희미하게 빨라진 것은, 억눌러 참을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책만 읽는 실내파라고는 하지만, 이래봬도 일단 꽃다운 나이대의 여자이고, 예쁜 꽃을 보면서 즐기기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카자미 씨가 보살피는 렌코의 맨션 화단도 꽤 훌륭하지만, 이곳은 역시 식물원.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핀 꽃의 화려함에는 눈이 쉴 틈이 없다.

「와, 메리, 저것 봐. 굉장하다.」

「정말, 융단 같아. ――레드 엠퍼러, 라나 봐.」

새빨간 튤립이 융단을 깐 것처럼 한가득 펼쳐져 있다. 붉은 황제라니, 튤립처럼 사랑스러운 꽃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이름이다.

「있지, 이 위에 뒹굴어보고 싶지 않아?」

「꽃이 망가질 뿐이잖아, 그거.」

그야 그렇지, 하고 렌코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튤립의 꽃말, 뭐였더라.」

「색에 따라서 달라. 아마 하얀색은 《실연》, 노란색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었던가.」

「……커플들을 위한 꽃말이 아니구나.」

좀 더 사랑스러운 꽃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분 탓이었던 걸까.

「그렇지만도 않아, 메리. 안 그래도 이렇게 빨간 튤립은 꽃말이――」

레드 엠퍼러라는 발밑의 튤립을 내려 보면서, 렌코는 나를 들여다보듯이 다가와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띠었다.

「《사랑 고백》, 이란다.」

그러나 그것은 렌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렌코와 얼굴을 마주보다가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역시, 생각지도 못했다고 해야 할지, 예상대로였다고 할지.

「――카자미 씨? 어, 우이.」

「안녕. 우연스럽게도.」

평소처럼 우이의 손을 잡고, 카자미 씨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우이는 어쩐지 뾰로통한 얼굴로 우리들을 올려보고 있었는데, 너머에 펼쳐진 튤립들을 보고 눈을 빛내면서,「츄립!」하고 환성을 질렀다. 손에 들린 인형이 휘둘러져서 파닥파닥 흔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허를 찔린 감이 없지 않은 채로, 우리들은 왠지 멍하게 인사를 했다. 카자미 씨와 식물원이라는 조합은 아무런 위화감도 없지만, 설마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니, 들키면 안 될 타이밍에 마주친 것도 아니지만――.

……들켜서 문제될 것 같은 일을, 애초에 렌코와 할 일도 없다, 응.

「빨개―.」

「그렇구나, 새빨가네.」

주저앉아 튤립을 구경하는 우이에게 렌코가 대답했다. 가득히 펼쳐진 튤립을 「후와――」하면서 보는 우이는, 평소 맨션에서 보던 화단과는 근본적으로 규모가 다른 꽃들의 수에 압도당한 것 같다.

「……카자미 씨는, 여기 자주 오시나요?」

「응. 이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 처음이지만.」

어쩌다가 물어보니, 카자미 씨는 우이에게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피었다, 피었다, 튤립 꽃들이[각주:4], 하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우이에게, 나란히, 나란히, 하얗고 붉고 노랗게, 하고 렌코가 따라 불렀다. 아이를 상대하는 렌코는 즐거워 보였다 나로서는 흉내 낼 수도 없겠다고 파트너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실은, 내가 데려올 예정이 아니었지만.」

「예?」

「아니야, 아무 것도.」

중얼거린 말. 내가 돌아보자, 카자미 씨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쪽은? 데이트니?」

「……그냥, 놀러왔을 뿐이에요.」

「어머나.」

꿰뚫어 본 듯한 카자미 씨의 질문에, 나는 일순 말이 막혔다. 내 대답에 카자미 씨는 유쾌하게 웃을 뿐. 얼굴이 뜨거워져서 나는 의미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방해하지 말아야겠네.」

「――아뇨,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다니죠.」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렌코와 손을 잡고 둘이서는 너무도 부끄럽다. 카자미 씨와 우이가 사이에 낀다면, 조금은 정신위생적인 상황 개선을 노려볼 수도 있다.

「어머, 괜찮니?」

떠보는 카자미 씨의 시선에, 「괜찮아요.」하고 나는 눈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四

「정말, 메리도 참.」

「왜?」

「데이트라고 했잖아.」

나를 째려보면서 렌코는 그렇게 말했다.

뒤에서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걷는 카자미 씨와 우이는 또 화단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것을 돌아보면서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슬슬, 밝힐 때가 되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되묻자, 「어?」하고 렌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파트너는 이제 와서 시치미를 뗄 생각인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부러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 말이야.」

「이유라니, 무슨..」

「여기에 결계가 갈라진 틈이라도 있어? 아니면 다른 거라도?」

눈앞의 파트너가 하는 생각은, 나로서는 언제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비봉클럽의 활동이라면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렌코와 함께 결계가 갈라진 틈을 찾거나, 수상한 장소를 탐험하는 것이 딱히 싫지도 않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대학생활의 즐거움이 됐다.

그 이유는――결국 이 우사미 렌코라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지금 렌코가 생각하는 것이 나로서는 전혀 모르겠다.

나와 데이트라니, 갑자기 그렇게 말해봤자――뭘 어쩌고 싶은 건지.

「그러니까 메리, 몇 번이나 말했잖아. 오늘은 비봉클럽 활동이 아니라.」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과장되게 어깨를 움츠리면서, 렌코는 대답했다.

「――그럼, 뭔데? 누구랑 식물원 데이트할 때를 대비한 예행연습?」

무심코 목소리가 험악해졌다고 생각한다.

내 표정에 렌코는 눈을 깜빡이더니, 그리고――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아하핫, 뭐야 메리, 혹시――질투하는 거야?」

「――――읏.」

허를 찔려 숨을 삼키는 내 뺨을 렌코의 손이 감쌌다.

몸을 움츠리는 내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쓰다듬듯이 어루만지고는, 렌코는 미소 지었다.

「메리, 뭘 오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지.」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렌코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경계가 보이는 내 눈에도, 렌코의 마음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초조하다.

「오늘 나는, 메리랑 데이트 하고 싶어서, 메리를 이곳에 데려온 거야. 다른 이유 따위는 아무 것도 없어. ――화창한 일요일을, 친애하는 파트너랑 함께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그 말의 참과 거짓의 경계를 찾아낼 수 있었다면, 분명 내 심장은 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그것은 보이지 않고, 그러니까 나는, 경종을 울리는 심장이 내보내는 혈액 때문에 새빨개진 얼굴을 렌코에게서 돌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렌코가 말하니까, 그래도 꿍꿍이가 있다고밖에 안 들려.」

「너무해라. 메리, 내가 지금까지 메리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바로 대답하려고 입을 연다. ――렌코는 얼버무리는 일은 있어도 거짓말을 하는 일은 아마도, 없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모처럼 입장료도 냈으니 묘한 거 지레짐작하지 말고, 즐기지 않으면 손해잖아?」

평소의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띠고, 렌코는 검지로 내 이마를 살짝 찔렀다.

접한 손가락 끝의 감촉도 묘하게 뜨거워서, 나는 단지 한숨밖에 쉴 수 없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메리가 일부러 질투할 상대 따윈 없어.」

「질투 안 했어.」

「정말?」

「왜 내가 렌코를, 그런――.」

「나는, 메리가 질투해준다면, 조금 기쁠 텐데.」

――그러니까, 어째서 이 파트너는.

그렇게, 대답하기 힘든 말을 살그머니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자 메리, 저쪽 온실, 가볼까?」

내게 등을 돌리면서, 렌코는 오른 손을 내밀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봤자, 결국은.

내민 오른 손을 잡는 순간이 역시 행복해지기도 했다.





      五

온실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의 표면은 커다란 연꽃잎으로 덮여있다.

「안 폈어?」

「그러게, 연꽃은 아직, 여름이 되면 예쁘게 핀단다.」

연못 난간을 붙잡고, 우이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옆에서 카자미 씨가 「위험하잖니.」하고 가볍게 나무랐다.

연(蓮)이라면, 옆에 있는 파트너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다.

「연은 분명, 엄청 오래된 열매에서도 꽃을 핀다고 하지.」

「고대연꽃 말이구나. 2천년 이전의 것이라도 발아한다나봐.」

「아득해질 정도네.」

「메리라면, 2천년 정도 자면서 지내도 괜찮을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 평소처럼 쓸데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우리들을 보고 곁에서 카자미 씨가 즐겁게 미소 지었다.

「메리 씨, 연꽃의 꽃말은 아니?」

「네? ……으음, 뭐였죠.」

「《웅변》이야.」

렌코를 보자 카자미 씨가 웃으며 말해준다. 나는 무심코 뿜었다. 하긴, 렌코랑 딱인 꽃말이다. 이름은 실체를 나타낸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렇지, 《침착》이라던가 《청순한 마음》도 있으니까, 나랑 딱이지?」

「스스로 말하기야?」

「내 마음은 부처님처럼 청렴결백해.」

「부처님?」

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부처님. 이상한 이름이지?」하고 렌코가 웃는다. 그 어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부처부처」하고 우이가 웃었다.

「부처님이라, 마침 저기 온실에 무우수(無憂樹)가 있어.」

「무우수?」

「아아, 부처가 태어난 곳이 무우수 아래였죠.」

카자미 씨의 말에 렌코가 답한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무우수라는 건 처음 들었다. 종교에는 연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한다.

「석가의 어머니 마야가, 무우수 꽃을 꺾으려고 손을 뻗었더니, 그 옆구리에서 붓다가 태어났어.」

「신화 같은 세계에서는, 왜 그렇게 이상하게 태어나는 걸까.」

「이브는 아담의 늑골에서 태어나고, 부처는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태어나고, 예수는 처녀잉태. 역시 특별한 존재는 특별하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나 봐.」

「근데 옆구리에서 태어난다니, 상상만 해도 호러잖아.」

「보통 인간의 출산도 눈앞에서 본다면 결국 호러 아닐까?」

우이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애초에 아이 앞에서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온실로 향했다.

밖은 봄이니까, 온실 속이라고 딱히 따뜻하고 말 것도 없다. 하지만 안으로 발을 들이니, 역시 어딘가 바깥하고는 다른 공기를 피부로 느낀다. 온실 안에서 생육하는 식물의 분위에 영향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추위에 내성이 없는 남쪽 나라의 식물이 조밀하게 무성한 온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식물들에게 시선을 두리번거리면서 통로를 따라 걷는다. 「아, 이거야 이거.」렌코가 소리를 질렀다.

올려다보니, 머리 위에 내려올 정도로 처진 오렌지빛깔 꽃이 피어있다. 구슬처럼 한데모여 핀 꽃잎 없는 꽃은, 어쩐지 자양화를 생각나게 한다.

플레이트에는 《무우수 (無憂樹) 》라고 써있다. 근심이 없는 나무. 부처님이 이 아래에서 태어났으니 순산이라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인도에서는 가로수로 심고, 또 불교의 사원에서도 많이 기르고 있다. 결혼・출산에 관해서는 복의 나무라고 사랑받고 있다――라는데.」

「인도에서는 도처에서 부처님이 태어나는구나.」

「메리, 그 발언은 여러 가지 생각하게 만드니 위험한데.」

바라건대 이 장소에 신앙 깊은 불교도가 없기를 빈다.

「유――?[각주:5]

우이가 플레이트를 보면서, 왠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응, 왜 그러니?」하고 렌코가 들여다보자, 「응――」하고 우이는 손에 든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목을 비틀었다.

그런 모습을 왠지 모르게 응시하던 나는 문득――그런 우이를 바라보고 있는, 카자미 씨의 기묘한 시선을 깨닫고 눈썹을 모았다.

카자미 씨는 뭔가, 근심 같은 것을 숨긴 시선으로, 우이를 바라본다.

무우수 밑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카자미 씨의 표정의 의미를 나로서는 모르겠다.

「이름.」

우이가,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내 이름. 유가 아니라, 우이야.」

그 플레이트를 가리키면서, 우이는 말했다.

플레이트에 써있는 이 나무의 이름―― 《無憂樹》.

렌코가 일순 눈썹을 모았다가, 그리고 무언가를 납득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아아――우이의 이름, 이 글자구나.」

「응.」

우이는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간신히 우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다.

쿠스리야 우이(薬屋うい). 그 이름은 히라가나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각주:6]라고 쓰고, 《우이》. ――쿠스리야 우이(薬屋憂).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六

온실을 나와서 벤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우이는 카자미 씨가 사온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입에 묻혀가면서 맛있게 핥았다. 그 입가를 닦아주는 건 카자미 씨가 아니라 렌코였다. 나, 렌코, 우이 순서로 나란히 앉고, 카자미 씨는 왠지 내 옆에 앉았다.

렌코가 사온 캔 커피를 마시면서, 카자미 씨에게 힐끔 시선을 던진다. 무우수 앞에서 카자미 씨가 우이를 바라보던 시선의 의미. 그것이 《근심(憂)》이었다면, 그 글자를 이름으로 가진 소녀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저어, 카자미 씨.」

먼저 무슨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카자미 씨는 그저 침묵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이의 이름은 히라가나도 《初》[각주:7]도 아니고, 《憂》인 거죠.」

「……응.」

카자미 씨는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메리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憂》라고 쓰고 《우이》라고 읽는 이름.」

「――――.」

카자미 씨는 입을 다문 내게 「솔직하게 말해줘.」하고 쓰게 웃었다.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죠. 좀 이상하네요.」

「그렇지. ――나도 동감이야.」

행복하게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한입 가득 무는 우이에게 눈길을 주면서, 카자미 씨는 미소 지었다.

「저 아이의 부모랑은 친하지만――왜 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그것만은 나도 모르겠어. 우울의 우 라니, 좋은 의미로는 받아들일 수 없잖아.」

확실히 그랬다. 《憂》라는 글자가 들어간 단어 중에 좋은 의미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무우수가 행복의 나무라고는 해도, 「근심(憂)이 없다」는 의미니까, 어떻게 해도 《憂》라는 글자가 내포하는 의미는 좋은 것이 없다.

「지금은 아직 괜찮지만. 저 애가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게 됐을 때, 그 글자의 의미를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내가 고민할 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항상 돌보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응.」

카자미 씨가 우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친어머니처럼 착각할 정도로 다정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역시 카자미 씨는 친어머니가 아니다. 그러니까, 친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의 의도를 모른다. 《憂》라는 글자. 그것을 자식에게 이름 붙인 의미.

「저기, 우이의 부모님은――.」

「아아, 오해하진 마. 바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우이를 미워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니까. 최소한, 일부러 나쁜 의미로 이름을 자식에게 붙일 사람들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상한 거야.」

캔 커피를 다 마시고, 나는 봄 햇살을 올려보았다. 상쾌한 푸른 하늘은 온화한 양기를 지면에 보내주고 있어서, 느릿한 시간의 흐름을 새겨갔다.

「……한 가지, 짐작 가는 바가 있어요.」

최근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저기, 우이가 항상 들고 다니는 인형, 카자미 씨가?」

「응? 아니야, 그건 우이 엄마가 외롭지 않으라고 준 건데――」

그 대답에 나는 끄덕였다. ――아아, 역시, 그런 의미인가.

「으음, 이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말문을 연다. 확증은 없다. 하지만 상상은 가능하다.

좋은 의미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憂》라는 글자에 이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하려면.

「전에 읽었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다정함(優しい)이라는 글자에는 사람인(人)변에다가 『슬픔(憂い)』이라고 쓰지. 그건 『사람의 슬픔을 이해한다.』라는 의미가 분명해. 그게 바로 다정함이란 거야.』――라고.」

「아――.」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자미 씨는 손바닥에 그 글자를 썼다.

「반대로 말하자면, 《憂》의 옆에 사람인변을 쓰면, 《優》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인형을 주었다?」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바빠서, 좀처럼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어머니는.

하다못해, 곁에 인형을 놓아서 그녀의 이름의 의미를 나타내려고 했다.

곁에 사람이 있으면, 《憂》는《優》가 된다.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다정함이 된다――그런 의미의 이름이 아닐까요.」

내 말에, 카자미 씨는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 내 이름에도 《優》라는 글자가 있는데도.」

카자미 씨――카자미 유카(風見 優花)씨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고맙다며 미소 지었다.

「확증은 없는데요?」

「괜찮아. ――멋진 의미를 찾을 수 있었으면, 그게 대답이니까.」

카자미 씨는 일어나서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우이에게 다가갔다. 우이는 입가를 닦는 것도 잊고 벤치에서 뛰어내려 카자미 씨의 발치에 달라붙었다.

그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카자미 씨는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우리들은 이만 가볼게. ――둘 다 천천히 즐기렴.」

방해하는 것도 미안하니까, 하고 웃는 카자미 씨에게 나는 무심코 쓰게 웃었다.

「자, 우이도, 바이바이.」

「우응? 바이바이?」

「응. 두 사람 데이트를 방해하는 건 이제 안 되니까.」

「데이뜨?」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는 우이에게, 나와 렌코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부터 렌코의 팔에 내 팔을 걸어 팔짱을 꼈다.

「응, 맞아. 데이트 중이야. 그렇지, 렌코.」

내 말에 렌코가 「그, 그렇지.」라고 대답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고 보인 건――기분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분명.





      七

「이사카 코타로의 『러시 라이프』였나?」

카자미 씨와 헤어지고 둘이서 손을 잡고 식물원을 일주했다.

나름대로 데이트다움을 만끽하고 난 후의 귀가길. 렌코가 돌연 그렇게 말했다.

「어?」

「카자미 씨한테 했던 이야기. 사람의 슬픔이 어쩌고저쩌고.」

「아아―― 맞아.」

옆에 있던 렌코도 역시 들린 모양이다. 그때 끼어들지 않은 건 분위기를 파악해서일까, 딱히 참견할 것도 아니라서일까.

「뭐, 메리로서는 멋진 대답이었어. 곁에 사람이 있으면, 다정함이 된다――라니.」

「나로서는, 이라니 무슨 의미야.」

「신경 쓰지 마.」

해맑게 웃은 렌코는 문득 눈가를 찡그렸다.

그 눈길은, 언제나처럼 뭐든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시선.

「……내 대답, 틀렸으려나?」

「으음, 정답, 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憂》는 『우울의 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글자, 억지로 이름으로 붙인다면, 《優》라는 글자랑 부합되는 의미밖에는 나도 모르겠어.」

모자챙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렌코는 깊숙이 눌러썼다.

「그치만, 인형이 사람인변을 대신하다니, 그건 좀 너무하다 싶어.」

「……그럼, 어떻게 된 걸까?」

「딱히 어떻고 말고가 아니라. 인형은 별로, 우이의 이름이랑 관계없다고 생각해. 우이의 이름에 덧붙이는 건《사람》이지 《인형》이 아니니까.」

「그럼, 곁에 있는 《사람》이란――.」

「그야 물론 부모님――이라기 보단, 어머니겠지. 이름으로만 보자면.」

렌코의 말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거기서 렌코는, 「아, 그렇지.」하고 손바닥을 부딪쳤다.

「메리, 우이네 부모님 이름은 모르지.」

「――들은 적 없으니까, 우편함에는 성씨밖에 안 써있고.」

「그럼, 퀴즈. 우이의 이름이 《憂》인 것은, 어머니의 이름 글자를 생각하면 이유를 알 거야. ――그럼, 우이네 어머니의 이름 글자는 뭘까요?」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게 퀴즈를 내봤자, 아무런 힌트도 없는데.

「힌트는 《사람인변》이야. 우이의 이름에서 부족한 부분.」

사람인변. 사람인변이 있는 한자는 얼마든지 있다. 《優》도 그 중 하나다.

설마 어머니의 이름이 《優》라는 것도 아닐 테고――.

「――아.」

거기서 어떤 생각에 미쳤다. 사람인변은, 우이의 이름에서 부족한 부분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어머니가 곁에 있어서 채워진다고 한다면.

「어머니의 이름은――사람인변을 빼더라도 의미가 바뀌지 않는 글자?」

「네, 정답.」

손가락을 튕기면서 렌코는 말했다. 나도 납득하고 끄덕였다.

자기 이름에서 남는 사람인변을 나눠주어서 《優》이 된다.

사람인변을 빼더라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 한자는 확실히 있다.

사람인변을 빼거나 빼지 않아도, 의미는 《행복》.

「근데, 좀 별난 이름이네. 뭐라고 읽어?」

「《미유키》였을 거야.」

「그럼, 오히려 사람인변이 없는 쪽이 자연스럽게 읽히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왼손바닥에 《優》라고 써본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왼손을 한번 꾹 쥐어보고, 나는 그 손으로, 렌코의 오른손을 잡았다.

언젠가 우이가 자기 이름의 의미를 궁금해 할 때.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이름을 나란히 써서, 그 뜻을 알려주겠지.

슬픔이 아닌 《憂》――《다정함의 憂》, 그 뜻을.

















모 히라사와 씨 관련 스레에서 본 글이 모티브입니다.

한 번 더 비틀었습니다만 원래 가진 날카로운 맛에는 미치지 못하네요.


浅木原忍
http://r-f21.jugem.jp/




 



 






  1. 한국의 빼빼로 같은 막대 과자 [본문으로]
  2. 燐光의 일본어 발음은 린코우, 글자 위치를 바꾸면 코우린. 향림당의 香霖과 발음이 같다. [본문으로]
  3. 생강초절임 [본문으로]
  4. 동요 "チューリップの花" (http://www.youtube.com/watch?v=Qwm-TXvY0SU&NR=1) [본문으로]
  5. 무우수의 憂는 '유'라고 읽는다. [본문으로]
  6. 근심 우 [본문으로]
  7. 처음 초, '우이'라고 읽을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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