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피지 않는 계절


原作者 : 浅木原忍 (http://r-f21.jugem.jp/)
原題 : ヒマワリの咲かない季節 
         (http://coolier.sytes.net:8080/sosowa/ssw_l/?mode=read&key=1249505488&log=83)
그림 : 상록수
번역 : 선배
작품 태그 : 비봉클럽, 유카와 리글… 같은 오리캐 있음, 희미하게 백합 냄새.

















 



 






      一


눈시울을 열자, 눈앞에 우사미 렌코의 얼굴이 있었다.


「안녕, 메리――」


멍한 시야에 고양이 같은 미소가 달라붙어,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사고 가동이 느리다. 상황 파악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에게, 렌코는 등을 돌렸다.


「아침밥 곧 되는데, 먹을래?」

「……응.」


멍하니 대답하면서, 나는 눈을 비볐다. 시선을 둘러보니, 낯선 색의 커튼이 창문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활짝 푸른 하늘이 보이고, 눈이 부셔서 간신히 의식이 각성한다.

이곳은 낯익은 내 방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잔 곳도 내 침대가 아니다.

렌코의 방, 렌코의 침대 위에서, 나는 멍하니 않아있었다.


「……어라?」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된 건가. 내 몸을 내려다보니, 역시나 낯선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심플한 민무늬인데, 렌코 것일까.

한 번 더 시선을 돌린다. 방구석에 놓인 쓰레기봉투를 빈 깡통이 몇 개인가 채우고 있었다.

 ――아아, 그랬다. 나는 간신히 어젯밤을 기억해냈다.

렌코가 매번 입수하는 수상한 정보를 바탕으로 폐허탐방과 말장난을 즐기는 비봉클럽의 회원 두 명. 그러나 딱히 이거다 싶은 재밌는 것도 없고, 결계가 갈라진 곳도 눈에 띄지 않고, 헛수고한 피곤을 풀기 위해 렌코 방에서 술잔치를 했던 것이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렇게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새 굉장히 취해버렸던 것 같다. 술잔치 도중부터 기억이 좀처럼 확실하지 않다.

관자놀이를 누르고 고개를 저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실에서 커피 냄새가 난다. 프라이팬에서 무언가가 익는 소리. 시계를 보자, 오전 아홉시를 지나고 있었다. 토요일 기상시간으로는 빠르지만, 아침 식사로는 조금 늦었을지도 모른다.


「커피, 거기 있어.」


부엌에서 프라이팬을 바라보는 채로, 렌코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커피포트에 모여 있던 커피를 컵에 따라 마시자, 간신이 제정신이 돌아온 기분이었다.


「자, 기다렸지.」


렌코가 가져온 것은 토스트에 얹은 베이컨 에그였다. 형태가 무너지지도 않았고, 노른자위가 갈라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너무 굽지도 않았다. 나는 무심코, 우파루파라도 본 것처럼 렌코를 바라보았다.


「왜?」

「……렌코 요리 할 수 있었구나.」


내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상을 말하자, 렌코는 반쯤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양 손으로 뺨을 잡고 쭈욱, 하고 잡아당겼다.


「헤호、아후헤호~」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메리. 이래봬도 난 가사 전반은 특기라구?」


확실히 방안은 꼼꼼하게 정돈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내 안에 있는 렌코의 이미지와 집안일은 잘 맞지가 않았다. 인스턴트를 사와서 끝내는 타입이라고만 생각했다.


「의외였어.」


당겨진 뺨을 문지르면서, 나는 한 번 더 베이컨 에그 토스트를 보았다.

이건, 본 것과 달리 맛이 말도 안 된다는 전개는…… 역시 없나. 렌코가 맛치인 것도 아니고, 괜찮겠지.


「뭣하면 메리, 돈 없을 때 우리 집에 오면 저녁밥정도는 만들어주는데.」

「……생각해볼게.」


잘 먹겠습니다, 하고 베이컨 에그 토스트를 물었다. 맥 빠질 만큼 평범한 맛이었다.


「맛있어?」

「보통.」

「여기선 겉치레라도 맛있다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렌코는 토스트를 입에 물면서 투덜댔다.


「달걀 프라이랑 토스트한테, 맛있다 맛없다 할 것도 없잖아.」

「메리, 지금 발언은 국제달걀프라이협회를 적으로 돌리는 거야.」

「……뭐야 그게?」

「전 세계에서 모인 달걀 프라이 애호가들이, 달걀프라이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논의하는 협회야. 세계달걀프라이애호모임의 회원 수는 칠백오십만 명, 그 중에서 엄선한 달걀프라이 마니아들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벌이는 대격론은 아침부터 밤까지――」

「세계에는 렌코처럼 한가한 사람이 많구나.」

「뻥이지만.」

「알고 있어.」


나 참, 렌코는 평소 그대로였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한숨을 한 번.


「근데, 달걀 프라이는 약간의 소금이랑 후추가 최고지.」

「달걀 프라이에는 간장이잖아?」

「뭐어? 간장 따위 뿌리면 간장 맛밖에 안 나잖아.」

「그건 너무 뿌린 거야. 달걀과 간장이 황금 조합인 건 계란밥이 증명하고 있어.」

「메리는 뿌리부터 일본인이구나.」

「일본인이야.」


밥과 빵 중에서 밥이 더 좋다.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아침을 거르는 일도 많아졌지만, 계란밥, 낫토, 김, 가끔은 《고항데스요》. 전날 밥이 남아 있으면 오차즈케도 좋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바라보면서, 새하얀 밥을 우물거리는 순간의 행복은 역시 각별하다.


「음, 그렇게 얘기하니 밥 먹고 싶어졌잖아. 안 지어서 없는데.」

「점심에 카레라도 먹으면 되잖아?」

「좋은데, 카레. 메리도 같이 먹을래?」

「……그 전에 돌아갈 거야.」


딱히 이 방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샤워도 하고 싶고, 이걸 다 먹으면 옷 갈아입고 집에 돌아가야지. 오늘은 토요일, 별다른 예정도 없으니, 어떻게 할지는 그 후의 일이다.


「우리 집에서 뒹굴뒹굴 거려도 별로 상관없는데.」

「그럴 이유도 없잖아.」

「나는 상관없는데 말야. ……후아암.」


토스트를 다 먹고, 렌코는 크게 하품을 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저 침대에서 잤다. 이 방에 침대는 물론 하나다. 그렇다면, 렌코는 어디서 잤던 걸까?


「있지 렌코, 어제 잤어?」

「응? 잤지. 뭐, 평소보다 수면시간은 짧았지만.」


하품을 눌러 참으면서, 렌코는 기지개를 켰다.


「어디서?」

「그야――」


렌코는 침대 쪽을 돌아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수상하게 바라보면서, 나는 커피를 입에 머금고,


「메리 옆에서.」


성대하게 분출했다.






      二


렌코가 사는 맨션을 나올 즈음에는, 벌써 태양이 하늘 높이까지 오르고 있었다.

눈시울을 두드리는 햇빛에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나는 청명한 하늘에 눈을 가늘게 떴다.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그리고 읽던 도중인 『석적심중(夕荻心中)』이라도 읽을까. 날씨도 좋으니까, 서점까지 외출하는 것도 좋겠다.

그런 일을 생각하던 내 시야의 구석에, 확하고 선명한 색이 들어왔다.

맨션 현관 앞의 화단이었다. 여러 가지 색의 팬지, 그리고 흰 마가렛이 심어져있다. 봄을 노래하는 꽃들에게, 나는 웃음을 띠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건물 그늘에서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자, 화단을 돌보고 있던 중인지 물뿌리개를 손에 든 여성이 내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 될까. 가볍게 웨이브가 깃든 세미 롱 머리카락. 체크무늬가 그려진 긴 스커트가, 화단의 꽃과 함께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다른 한쪽의 손에는 흰 양산을 꽃처럼 피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내가 꾸벅 인사 하자, 그 여성은 웃는 얼굴로 화단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모습을 본다. 꽃 그 자체에 웃음을 건네는 그녀의 미소는 밝아서, 태양과 같은 미소는 이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화단은…….」

「내가 보살피고 있어. 계절 따라서 여러 가지 꽃이 펴.」


그녀가 시선을 향하는 곳을 보니, 햇빛이 잘 비추고 있는 동쪽, 남쪽으로 화단이 줄지어 있었다. 지금은 꽃이 피지 않은 화단도 몇 개 있다. 여름이나 가을꽃이 심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어떤 꽃을 좋아해?」

「……봄꽃이라면, 벚꽃이에요.」

「벚꽃은 좀, 화단에는 심지 않았어.」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을 준 팬지 꽃잎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벚꽃의 꽃말 알고 있어?」

「……우아한 아름다움, 이었던가요.」

「왕벚꽃나무의 꽃말은 《우아한 미인》. ――당신과 꽤 어울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우아하게 이쪽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이성에게 들었다면 소름 돋을 말이라 견딜 수 없었겠지만, 그녀에게 듣자 왠지, 꼭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 카자미(風見)씨 말이군.」


결국 점심은 렌코에게 불려서, 함께 역 앞 지하의 카레 가게에 들어갔다.

락교와 후쿠진즈케를 잔뜩 담는 렌코를 보면서, 내가 맨션 앞에서 만난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렌코는 곧장 짐작이 갔는지 끄덕였다.



「화단 돌보기는 그 사람이 전부 해. 본업도 꽃가게였나 그렇고.」

「굉장히 꽃을 좋아하나봐.」

「요즘에 깜짝 놀랄 만큼 《좋은 사람》이야. 아이를 좋아해서 우리 맨션에 사는 꼬맹이들 놀이상대도 하고 있고. 미인인데다가 이상한 소문도 없으니까 완벽하지.」


치킨 카레를 우물거리면서 렌코는 말했다. 딱히 비꼬는 것 같지도 않아서, 그녀는 솔직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삐뚤어진 렌코로서는 드문 일이다.


「렌코가 그렇게 솔직하게 평가하다니, 오히려 뭔가 있을 것 같아.」

「그냥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을 뿐이라니까. 거기서 자주 꽃을 돌보고 있으니까, 맨션에 드나들면서 인사는 자주 하지만.」

「흐응.」


카레는 생각보다 매웠다. 얼얼한 입안에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디저트인 아이스크림이 나와 제정신을 차린다. 차가운 달콤함이 기분 좋았다.


「지금은 팬지나 튤립 같은 것도 피고, 여름은 해바라기, 가을은 코스모스. 예뻐.」

「뭐, 렌코 집에 또 가는 일이 있으면, 조금 기대해둘게.」


해바라기. 지금부터 더 더워지면, 그 화단에 태양처럼 샛노란 꽃이 키도 크게 피는 것일까. 상상해보면, 그건 역시 상당한 장관이었다.


「근데 메리.」

「왜?」

「다음에, 나도 메리 집에 가도 돼?」


렌코의 말에, 나는 무심코 눈을 깜빡였다.


「……상관없는데, 근데 온 적 없었어?」

「없었어. 그러니 뭐, 다음에 놀러 갈게.」

「약속은 하고 나서 와.」


물론, 하고 렌코는 웃지만,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아이스의 차가움을 입 안에서 녹이면서, 방 좀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三


아스팔트가 벗겨진 길 구석에는, 민들레가 자주 피어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노란 꽃에 일부러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다. 어디나 피는 민들레는 그 외 잡초와 같이, 흔한 풍경의 일부분이다.

일부러 그것에 눈길을 주거나 꺾어서 노는 건, 아이들 밖에 없을 것이다.

지나가던 공원에서, 모래 밭 근처에 피고 있던 민들레를 작은 여자 아이가 꺾고 있었다. 옆에서 모래 장난을 하던 다른 여자 아이의 머리에, 노란 색과 녹색의 화관을 씌운다.

그런 흐뭇한 광경에 미소를 짓고 있자니, 「메리, 왜 그래?」하고 앞에서 걷던 렌코가 뒤돌아본다. 나는 발밑을 둘러봐, 피어있던 민들레를 한 송이 꺾었다.


「어릴 때, 솜털을 날리면서 놀지 않았어?」


내가 내밀자, 렌코는 어쩐지 기묘한 표정으로 받았다.


「어렸을 때 난, 이 솜털은 민들레가 절대 아니라 다른 뭔가라고 믿었는데.」

「다른 뭔가?」

「봐, 이 노란 꽃이 어느새 이런 흰 솜털로 바뀌는 건 아무래도 믿지 못했던 거야. 뜰에 핀 민들레가 어느 샌가 솜털이 됐을 때는, 속은 기분이었어. 이 민들레를 바꿔치기한 건 누구야―― 하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신기하다. 이 노란 꽃 어디에서 이런 하얗고 둥실둥실한 솜털이 나타나는 걸까.


「아 그래 메리. 민들레 꽃말 알아?」

「진심, 이었었나.」

「내가 알고 있는 건, 진심으로 하는 사랑, 변덕, 그리고―― 이별이야.」

「이별?」


렌코는 살랑살랑 손가락에 든 민들레를 흔들었다.


「어느 날, 남풍은 들판에 멈춰선 노란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그 소녀를 항상 바라보았습니다. 어느새 그녀는 백발의 할머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남풍이 한숨을 쉬자, 백발의 할머니는 날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별이래.」

「좀 너무한 이야기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렌코가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올려, 거기에 민들레를 놓았다.


「오히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남풍은 노란 머리칼의 소녀가 어느새 흰 솜털이 된 줄 몰랐습니다. 남풍은 소녀를 불렀지만, 그 소리는 바람이 되어, 솜털이 된 소녀는 날아가 버리고, 남풍은 이제 소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배드 엔드잖아.」

「그래도, 이게 더 《이별》이란 느낌 아니야?」


뭐 하긴. 나는 돌려받은 민들레를 내려 본다. 작은 꽃잎이 모인 형태의 노란 꽃은, 작은 태양처럼 보였다. ――태양과 다툰 건 북풍이었나.


「노란 머리카락이라고 해서 그런데, 메리도 언젠가 솜털 같은 백발의 할머니가 되는 걸까.」

「오십년 후 이야기? 그럼 21세기도 끝나겠네.」


칠십 세가 된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직 이십년 밖에 살지 않은 내게는, 오십년은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시간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걷고, 어떻게 늙어가는 것일까.


「그래도, 메리가 할머니가 되도 나는 한숨을 쉬거나 하지 않을 거야.」

「……애초에, 그때는 렌코도 할머니잖아.」


나랑 동갑인 주제에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람. 내가 기막혀 어깨를 으쓱이자, 렌코는 크게 웃었다.


「글쎄, 의외로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르지.」


――우주라도 갈 생각일까. 렌코라면 그럴 만도 하다. 신기한 것을 찾아, 우라시마 효과가 나타나는 우주 저 너머까지 뛰쳐나갈 수도 있다.


「뭐, 메리라면 할머니가 되지 않아도, 뒷마당에서 차라도 마시면서 햇볕을 쬐는 게 어울릴 것 같지만.」

「고양이라도 쓰다듬으면서? 그래, 나쁘진 않네.」


예를 들면 이런 따스한 햇볕이 비추는 오후, 눈부신 태양에 눈을 가늘게 뜨고, 무릎 위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차를 마시고. 게다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렌코.


「…………」

「응,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면 마치, 나와 렌코가 노부부 같잖아.

이상한 상상을 뿌리치듯이,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렌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四


다음에 렌코가 사는 맨션을 찾은 것은,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이었다.

근처 지하철역에서 만나자고 했었지만, 평소 늦어도 오 분 이내 모습을 드러내는 렌코가, 그 날은 십오 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은 이럴 때도 있지, 하고 책을 읽으면서 기다렸는데, 심지어 삼십 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기에 전화했더니 『미안, 지금 일어났어.』라고 대답했다. 그런 이유로, 렌코의 맨션까지 마중 나오게 됐다.

오층 맨션을 올려보고, 나는 현관 앞의 화단을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팬지와 마가렛이 갖가지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화단. 반대쪽에는 튤립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카자미씨는 오늘도 돌보고 있었던 걸까.

화단을 바라보던 내 옆을 작은 그림자가 지나간다. 돌아보니, 반바지 차림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앤가. 이 맨션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머, 당신은 저번에.」


이번에는 현관에서 들리는 목소리. 오토 록을 안쪽에서 열고, 지난 주 보았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자미씨다. 옆에는 인형을 안고 있는 여자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따님인가?

꾸벅 인사를 한 내게, 카자미씨는 우아하게 미소 짓고는, 여자 아이의 손을 이끌어 화단 앞에 데려간다. 어두운 얼굴로 인형을 안고 있던 소녀는, 카자미씨가 보여주는 꽃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보이지만, 한 편에 핀 작은 꽃에 눈길이 닿자, 살짝 얼굴을 핀다.


「그건 은방울꽃이란다, 우이야.」

「은방울?」

「그래, 방울처럼 예쁘지? 그래도 먹으면 안 돼. 배가 아프니까.」


우이라고 불린 소녀는 은방울꽃을, 방울을 울리면서 놀듯이 찔렀다. 그 모습을 모친과 같은 시선으로 카자미씨는 보고 있었다. 역시 따님일지도 모른다.

나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게 살며시 다른 화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렌코는 어차피 슬슬 나올 것이다. 꽃이나 보면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머?」


 ――갑자기 나는 묘한 것을 깨닫고 발을 멈추었다.

내 목소리를 눈치 챘는지, 카자미씨가 이쪽을 돌아본다. 「무슨 일이니?」하고 목소리를 높인 카자미씨에게, 나는 내가 발견한 것을 가리켰다.

그곳은, 아직 풀도 자라지 않은 흙뿐인 화단. 그래서 무엇이 심어져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곳에 깔린 흙에 민들레가 나있었다.

아니――그 표현은 부정확하다.

그 민들레가 화단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건 명백했다. 줄기가 반까지 꺾인 민들레가 부드러운 화단에, 마치 향이라도 올리는 형태로 꽂혀있는 것이다. 물론 향처럼 줄기가 단단하지도 않으니까, 꽃은 풀썩 흙 위에 넘어져있지만.


「어머나……또 이렇게.」


곤란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카자미씨는 화단에서 민들레를 주웠다. 네 송이 정도가 똑같이 화단에 심어져 있었다.


「또?」

「요즘에, 항상 그래. 누가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자미씨는 한숨을 쉬면서, 꺾인 민들레를 내려 본다.

우이라고 불린 소녀가, 카자미씨가 손에 든 민들레를 신기하게 올려보았다.


「아이들 장난일까요?」

「그렇다고는 생각하지만…… 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민들레? 하고 우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민들레. 카자미씨가 미소 지었다.


「우이 방에 장식해둘까.」

「……응.」


건넨 민들레를 잡으면서, 우이는 웃었다.

아이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나지만 그 미소는 역시 사랑스러웠다.

그 미소를 응시하고 있던 나는, 문득 시야 구석에 들어온 그림자가 눈에 띠었다.

휙 그늘에 숨은 그 모습은 방금 전 남자 아이였다.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남자 아이는 내 눈에서 멀어졌다. 나는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五


「화단에 민들레?」

「그래. 줄기부터 꺾여서, 심는 것처럼.」


결국 약속 시간에서 사십오 분 늦게 맨션을 나온 렌코는, 아직 잠기운이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트레이드마크인 모자로 억지로 누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렌코가 늦잠이라니 별일이네.」 라고 내가 말하자,  「어제 밤샘을 너무 해서 그런가.」하고 렌코가 단정치 못하게 하품을 했다.


「줄기부터 심어봤자, 거기서 뿌리가 자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민들레를 화단에 심고 싶었다니, 꽤나 아이 같은 발상인걸.」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동안, 렌코를 기다릴 때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 하자, 렌코는 코를 울리면서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생각할 게 생겼을 때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건 렌코의 버릇이다.


「아이 하니까 생각났는데, 카자미씨가 여자 애를 데리고 나왔어, 따님이야?」

「음, 우이 얘기하는 거야? 그 애는 아니야. 내 방 아래에 살고 있는 쿠스리야(薬屋)씨네 아이야.」

「……맨션 안에 약국(薬局)?」

「쿠스리야(薬屋), 라고 하는 성씨야.」


아아, 그렇구나. 맨션 안에 약국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부모님이 바쁘신가 봐서, 주말에는 카자미씨가 자주 돌봐주는 모양이야.」

「맨션 안 사정에도 자세하구나, 렌코.」


나는, 근처 방에 누가 살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가끔 안뜰에서 친목 파티 같은 걸 하니까. 공짜로 바비큐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참가하고 있지. 뭐 그런 때 여러 가지 들리니까.」


귀가 밝다.


「그럼…… 그밖에, 남자 애도 살아?」


문득, 그늘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 아이를 떠올리면서, 나는 물었다.


「남자 애?」

「다섯 살 정도.」

「반바지?」

「그래 맞아.」

「아아, 호타루카와(螢川)씨네 리쿠 말이지. ――그 애도 카자미씨를 잘 따르던 걸로 아는데.」


그러고 보니, 렌코가 짝하고 손뼉을 쳤다.


「작년 여름에, 화단에 핀 해바라기가 몇 갠가 망가져서 꺾인 일이 있었어. 뭐, 범인은 놀다가 화단에 넘어진 리쿠였지만.」

「어머.」

「카자미씨가 화낸 걸 본 건 그때 밖에 없어. 엄청 조용하게 화내고 있다는 느낌인데, 그건 소리 지르는 것보다 효과가 있었어.」


흐음,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화단에 민들레로 장난을 친 건 그 남자 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 거라면 장난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카자미씨를 잘 따르고 있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 화단, 카자미씨가 만들었다고 하니까. 거기에 핀 꽃은 그녀에게는 자식 같은 거겠지.」


귀여워하듯이, 한창 피는 꽃에 미소를 짓던 카자미씨의 옆얼굴을 생각한다.

데리고 있던 여자 애가 따님이라고 여겼던 것도, 그 미소에 어머니의 자애가 가득 차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낯익은 모퉁이를 만나 나는 발을 멈췄다. 지하철역은 오른쪽이지만, 왼쪽으로 꺾으면, 분명,


「메리?」


왼쪽 모퉁이를 들여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본 적 있는 건물이 있었다.

이전에 들른 적이 있는, 카미사와 케이코(神沢景子)씨가 일하고 있는 유치원이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였던가. 나는 혼자서 납득했다. 우이나 리쿠라고 하는 남자 애도 평상시는 이 유치원에서 카미사와씨에게 보살핌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뭔가 보였어? 결계가 갈라진 곳이라던가?」

「으응, 아니.」


고개를 젓는 내게, 렌코는 내 시선을 따라가다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유치원이 왜? 아, 혹시 메리가 옛날에 다녔던 곳?」

「나는 유치원은 다니지 않았어.」


토요일이기 때문인지, 여기서 보이는 유치원 운동장에 아이의 그림자는 없었다. 아이들의 환성이 없는 유치원 건물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다.


「그러고 보니 메리한테도, 우이처럼 귀여웠던 시절이 있었겠지. 그때 사진은 없어? 꼭 보고 싶어.」

「친가에 돌아가면 있을 것 같지만…… 근데, 지금은 귀엽지 않다는 말투잖아.」


내가 반쯤 감은 눈으로 노려보자, 「아니아니, 메리.」 하고 렌코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면서 신체를 끌어당기듯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렌코의 얼굴이 확 가까워져, 왠지 의미도 없이 얼굴이 뜨거워졌다.


「동성인 내가 봐도, 메리는 상당히 아름답다니까?」

「금발 보정이지 않아? 일본인은 블론드를 좋아하잖아.」

「나는 딱히 그런 취향은 없어. 메리도 책만 읽지 말고, 좀 더 자기 외모를 신경 써도 좋다고 보는데.」

「렌코한테 듣고 싶지는 않네, 그거.」


항상 같은 옷을 입는 렌코에게만은, 패션을 지적받고 싶지 않다.


「어라, 어울리지 않아?」

「그런 이유가 아니라.」

「우선 메리는, 그 문손잡이 커버 같은 모자는 쓰지 않아도 되잖아?」

「됐어 이건,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나저나 문손잡이 커버는 좀 심했다. 나는 모자를 누르면서 한숨을 한 번.

길가에서 이런 회화를 해봤자 어쩔 수 없다. 나는 렌코의 손을 떼면서, 지하철로 향했다. 빠르게 걷자, 기다려, 하고 종종걸음으로 렌코가 쫓아왔다.


「근데 렌코야말로, 어린 시절이 좀처럼 상상되진 않는데.」

「응, 나?」

「어렸을 때부터 분명 말만 앞서고 건방진 아이지 않았어?」

「실례야. 총명했다고 듣고 싶은데.」


스스로 그렇게 말하니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기가 막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립긴 하네. 유치원 시절이라――」


그러자 문득, 렌코가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 내가 돌아보니, 렌코는 모자를 한 번 벗고, 손가락에 걸어 휙 돌리고는――다시 쓰면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뭐야, 그런 거구나.」


손뼉을 치면서 웃는 렌코에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그렇구나, 이거 또 흐뭇해지는 이야기네.」

「……뭐 좀 알아냈어?」

「응, 상상이지만. 이거, 유치원에 안 다닌 메리는 잘 모르겠네.」


또다. 여전히 혼자서 멋대로 납득하는 나쁜 버릇이다. 나는 렌코만큼 세상 구조가 보이지 않다는데도.


「아이들은 말이야, 가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을 하는 거야――그런 이야기지.」

「전혀 모르겠어.」

「그럼, 메리를 위해서 살짝 예정을 바꿔볼까. 화단에 장난친 범인을 찾으러 가자. ――분명, 바로 근처에 있을 거야.」


렌코는 그렇게 웃으면서, 빙글 돌아서 왔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나는 당황하면서 그 뒤를 쫓았다.






      六


렌코의 맨션에서 걸어서 오 분 정도인 곳에 작은 공원이 있다.

그 모래밭 옆에는 민들레가 군생하고 있다. 노란 꽃이 회색 모래밭 주위를 물들이듯이 피어있는 모습은, 어딘가 밝고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 민들레를 따고 있는 작은 그림자가 공원 안에 있었다.

렌코는 그 모습을 찾아내자, 조용하게 뒤로 걸어갔다.


「거기 소년, 누나가 좋은 거 하나 가르쳐주지.」


반바지 소년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렌코를 노려보듯이 올려보았다.

렌코는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띠우면서 모자챙을 들어올리고,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소년은 꺾은 민들레를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화단에 민들레를 심어도 말이야――」


렌코는 꺾인 샛노란 꽃에 눈을 응시하면서, 쓴웃음을 짓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해바라기가 되진 않아.」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렌코를 올려본다.

렌코는 어딘가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리쿠를 데리고 맨션 앞으로 돌아가니, 화단을 돌보던 카자미씨가 의외라는 얼굴로 우리들을 마중 나왔다.


「리쿠에 우사미씨? 무슨 일 있었니?」

「아뇨, 그냥 좀 화단의 민들레 때문에.」


렌코가 그렇게 말하고 리쿠의 등을 살짝 밀자, 리쿠는 머뭇거리면서 고개 숙인 채로 카자미씨에게 다가갔다. 손에 들고 있던 민들레를 내민다.


「……해바라기, 죄송해요.」


리쿠의 말에, 카자미씨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서, 대신에, 내가 해바라기, 심으려고 해서――」


그 말에, 카자미씨는 렌코처럼 모두 이해한 것 같았다. 그 얼굴에 또 다시, 부드러운 봄 햇빛과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목장갑을 벗으면서 리쿠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는다.


「그랬구나. ……고마워, 리쿠.」


부끄럽게 고개를 숙이는 소년에게, 카자미씨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직 흙밖에 안 보이는 화단을 바라본다.


「그래도 괜찮단다. 올해도 여름이 되면, 해바라기는 햇님을 받아서 건강하게 필 테니까.」


리쿠처럼 잔뜩 건강하게, 하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카자미씨는 웃었다.


「유카씨처럼, 밝고 예쁘게?」

「어머.」


카자미씨는 생각지 못한 말에 활짝 얼굴을 핀다. 리쿠는 쑥스럽게 뺨을 긁적였다.

요즘 아이들은 조숙하구나, 하고 렌코가 어깨를 으쓱인다. 나는 흐뭇한 광경에 미소가 흘렀다.

카자미씨의 이름은 유카였구나. ――분명 한자로는, 《優花》라고 쓰겠지.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七


「그러니까, 그 애는 민들레가 꼬마 해바라기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뭐, 그런 거지.」


내 말에 렌코는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이들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발상을 한다.

확실히 같은 노란색에다가 모습도 비슷하지만, 적어도 나는 할 수 없는 발상이다.


「화단에 민들레를 심으면, 커져서 해바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재밌는 이야기지.」


맨션에서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렌코는 모자를 돌리면서 웃었다.


「그래도, 왜 그런 오해를 했던 걸까.」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렌코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그것도 유치원생다운 착각이지.」

「유치원생다운?」


그러고 보니 렌코는 『유치원에 안 다닌 메리는 잘 모르겠네.』라고 했었지.


「유치원에서 반 이름으로, 자주 꽃 이름이 붙어. 복숭아 반이나, 벚꽃 반, 제비꽃 반처럼 말이야. 내가 다니던 곳도 그랬어.」


역시 렌코의 유치원 시절은 상상도 되질 않지만, 나는 끄덕였다.


「그래서, 반마다 꽃의 색깔로 구별해. 복숭아 반이나 벚꽃 반은 분홍, 제비꽃 반은 보라. 그리고 학년마다 같은 색의 꽃으로 반 이름이 붙여지는 거야.」


거기까지 듣고, 간신히 나도 이해가 갔다.

지금 계절은 봄. 그 아이는 바로 얼마 전에 학년이 하나 올랐다.


「그래, 예를 들어서 유치원 반 이름 중에, 《민들레》반이 있었다면.」

「――학년이 올랐을 때, 같은 노란 꽃 반 이름이 《해바라기 반》이었다.」

「정답. 뭐, 확인한 건 아니지만, 분명 그럴 거야.」


렌코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면서, 문득 발을 멈추고 길가를 내려 보았다.

길가에는 노란 민들레꽃이 흔들거렸다. 렌코는 그것을 하나 꺾어, 내게 내밀었다.


「자, 메리.」

「……고마워.」


무심코 받으면서, 나는 작은 태양 같은 꽃을 바라보았다.


「――《이별》의 민들레를 건네주는 건, 난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여기선 좀 더 보편적인 의미로 받아주었으면 하는데.」

「《변덕》? 렌코는 언제나 변덕스럽지만.」

「메리도 참, 정말 무정하네.」


어깨를 으쓱이는 렌코에게, 나는 훗 하고 웃었다.


「카자미씨한테 부탁해서, 그 화단에서 마가렛이나 한 송이 받을까.」

「응? 누구 주려고?」

「글쎄.」


렌코가 건넨 민들레를 가슴 주머니에 꽂으면서, 오른손을 잡았다.

조금 쑥스러운 듯이 모자를 고쳐 쓰고, 렌코는 내 손을 꽉 붙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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